역사의 재발견
윤슬 아래
잠들어 있던
우리 강의 노래
기획전시 ‘한강, 소리로 흐르다’
글. 박향아 / 사진. 고인순
역사의 재발견
글. 박향아 / 사진. 고인순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수백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한강의 곁에 삶을 기대어 살아간다. 한강과 함께 켜켜이 쌓아온 우리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서울우리소리박물관 기획전시 <한강, 소리로 흐르다>. 두 눈을 잠시 감고 공간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윤슬 아래 숨겨져 있던 옛사람들의 삶의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우리네 삶의 기쁨과 슬픔, 그리움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소리’를 따라, 서울우리소리박물관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줄기, 한강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다정한 휴식처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등지고 자전거 페달을 밟거나, 둔치에 마주 앉아 시원한 강바람에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곳. 지금의 한강은 도시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시계를 수백 년 전으로 돌려보면, 한강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온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묵묵히 흐르는 강물 위로 생필품을 가득 실은 돛단배가 오가고, 나루터에선 고단한 노동을 잊게 해줄 뱃노래가 들려왔을 터. 우리 곁에서 수백 년을 함께한 물길에 삶을 내어 맡겼던 이들에게 한강은 과연 어떤 의미였으며, 그들의 기억 속 한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창덕궁 돌담길 옆, 고즈넉한 한옥 안에 자리한 ‘서울우리소리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내 유일의 향토민요 전문 박물관인 이곳의 기획전시실에서는 마침 아주 특별한 전시, <한강, 소리로 흐르다>가 진행 중이다. 보통의 박물관이 눈으로 보는 유물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증명한다면, 이 전시의 주인공은 형체가 없는 ‘소리’. 전시는 입에서 입으로, 세월에 기대어 전해 내려온 민요를 매개로, 한강이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우리네 삶을 오롯이 품고 흐르던 ‘삶의 무대’였음을 증명한다. 뱃놀이의 흥과 뱃사람의 고단함, 삶의 희로애락, 서울에 대한 그리움까지, 한강을 노래한 민요 자락을 따라, 전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전시는 크게 세 개의 물결을 따라 흐른다. 1부 ‘한강에서 노닐다’에서는 흐르는 강을 보며 풍류를 즐겼던 우리네 이야기가 한강과 함께 펼쳐진다. “한강수라 길고 맑은 물에 수상선 타고서 에루화 뱃놀이 가잔다.”<한강수타령>의 첫 소절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한강에서 놀았다. 배를 띄우고, 관악산을 바라보고, 압구정 너머로 저무는 해를 구경했다. 그러다 흥이 오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한강수타령>이다.
함께 소개되는 <노들강변>은 조금 다른 결의 노래다. 1934년 신불출이 가사를 쓰고 문호월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노들나루(지금의 노량진 일대)를 배경으로 세월의 무상함과 이별의 정서를 노래한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불리며 경기민요의 하나로 자리 잡을 만큼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노래였다.
2부 ‘한강에서 일하다’는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노동 현장으로서의 한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시절 한강의 풍경을 담은 사진 앞에 서서 헤드폰을 쓰면, 뱃사람들의 소리가 고된 삶의 무게를 품고 울려 퍼진다.
<시선뱃노래>는 생선, 땔감, 곡식 등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가득 싣고 강화도에서 출발해 행주산성, 선유봉, 밤섬을 지나 마포나루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시선배 사공들의 노동요다. 무거운 노를 저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고자 불렀던 노래. 그들에게 소리는 고단함을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인제뗏목아리랑>은 더 먼 길을 거슬러 온 노래다. 강원도 설악산 일대에서 베어낸 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인제에서 춘천을 지나 광나루까지 운반하던 뗏목꾼들이 부르던 아리랑. 험한 물살을 헤치며 서울을 향해 내려오는 그 여정이,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강은 그 시절 서울과 지방을 잇는 물류의 대동맥이었고, 이 노래들은 그 위에서 삶을 꾸려온 사람들의 생생한 노동의 기록이다. 아름다운 선율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세 번째 이야기 ‘한강과 함께하다’는 흥미로운 반전을 품고 있다. 사실, 여기서 소개되는 민요는 한강이 흐르는 서울에 살던 사람들만의 노래가 아니다. <진도아리랑>, <청춘가>, <너영나영> 등 전국 각지에서 불렸던 민요들 속에 ‘한강’이 등장한다. 평생 서울 땅을 밟아보지 못한 이들에게도 한강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선 은유였다. 언젠가 닿고 싶은 ‘동경’의 공간이자, 척박한 삶에 쉼을 주는 ‘큰 강’, 그리고 나라의 중심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불렸던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이 땅의 사람들이 한강을 보며 떠올렸을 기회, 꿈, 그리움. 한강은 서울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의 이야기를 품어온 강이었다. 각자의 고단한 삶 속에 한강이라는 마음속 물줄기를 품고 살았던 옛사람들의 낭만과 애환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무형의 소리를 눈앞에 그려지게 만드는 아날로그적 장치들도 이 전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다. 공간 한가운데 놓인 오래된 축음기는 관람객들을 시간 여행으로 초대하는 통로. 내부를 개조한 축음기에 스마트폰 QR코드를 인식하면, 1930년대 오케(Okeh)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박부용 명창의 <노들강변>이 옛 SP음반 특유의 지글거리는 노이즈를 품고 흘러나온다.
전시의 대미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는 ‘기억 속의 한강’ 체험 공간이 장식한다. 따뜻한 조명이 켜진 책상에 앉아 헤드폰을 쓰면, 화면 속 한강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리가 먼저 귓가를 스치면, 시선은 천천히 강물을 따라간다. 그 곁에는 한양을 에워싼 물길이 담긴 옛 지도와 1950년대 한강을 찍은 사진집이 놓여 있다. 전시를 다 둘러본 관람객들은 책상 위 색연필을 들어 엽서에 저마다의 한강을 그리고, 그렇게 벽면은 조금씩, 사람들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어머니의 자장가로 시작해 치열한 노동의 현장을 거쳐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순간까지, 우리의 모든 삶의 굽이에는 늘 소리가 함께했다. 시대가 변해 노를 젓던 뱃사공은 사라졌어도, 강변에서 음악을 들으며 삶을 달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한강은 그렇게, 오늘도 우리 곁을 흐른다.
과거의 뱃사공들이 노래를 불렀듯, 지금의 우리도 한강에서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합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인류 보편적인 삶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죠. 한강이라는 공통의 공간과 소리를 통해 과거와 현재, 나와 우리의 문화적 공감대가 형성되길 바랐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자라나고, 어른이 되어 노동요를 부르며, 훗날 누군가의 노래를 들으며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 모든 삶의 과정에 우리 민요가 있습니다. 고리타분한 옛 노래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향토민요를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 2026년에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 개봉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시가 열릴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기간:
2025년 6월 19일~2026년 5월 28일
장소:
서울 종로구 율곡로 96 서울우리소리박물관 기획전시실
입장료:
무료
문의:
02-742-2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