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재발견

스크린 뒤에 남겨진
100년의 기록,
한국영화박물관을 거닐다

글. 박향아 / 사진. 김성재

한국영상자료원 이미지

영화는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가장 완벽한 꿈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상영관, 영사기의 빛이 스크린에 닿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 세밀하게 조립해 낸 완벽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지만 시선을 스크린 뒤편으로 돌려보면, 그 꿈을 현실로 빚어내기 위해 분투했던 많은 이들의 진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네 삶과 꿈이 녹아든 명작을 만들어내기까지, 100년이 넘는 한국 영화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 스크린 이면에 새겨진 치열한 기록들이 시대를 넘어 새로운 페이지로 이어지는 곳, 상암동 ‘한국영화박물관’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1층에 자리한
한국영화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영화 전문
국립박물관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초기 영화 장치 '시네마토그래프'를 재현한 모형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초기 영화 장치 '시네마토그래프'를 재현한 모형

마법의 시작, 영화가 태어나던 순간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1층에 자리한 한국영화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영화 전문 국립박물관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초기영화로의 초대〉, 영화라는 매체가 이 세상에 처음 등장하던 순간을 재현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영상을 찍고 소비하는 시대지만, 19세기 후반 처음 등장한 ‘활동사진(영화)’은 그야말로 마법이었다. 전시장에 놓인 나무 상자 모양의 ‘키네토스코프’는 발명가 에디슨이 고안한 초창기 영화 기기다. 나무 상자 안에서 필름 릴이 천천히 돌고 작은 렌즈 너머로 빛이 살아 움직인다. 동전을 넣고 혼자 들여다보는 방식은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곁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 함께 영상을 보던 인류 최초의 대중 상영회 풍경이 펼쳐진다. 1895년 파리 그랑 카페의 그날처럼 관람객이 직접 손잡이를 돌려 영사기를 작동시킬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술사 출신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의 작업 방식이다. 전시실에는 그가 흑백 필름에 직접 색을 칠해 최초의 채색 영화를 만들었듯, 관람객이 직접 흑백 화면 위에 색을 입혀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완성한 그림을 전송하면 큰 화면 위로 나의 색깔이 떠오른다. 130년 전 영화가 탄생하던 순간의 설렘, 지난한 수작업만으로 환상을 구현해 냈던 옛 창작자들의 노력이 손끝에서 다시 한번 반짝인다.

스크린 위로 흐르는 시대의 풍경, 한국 영화의 발자취

‘영화 탄생’의 거리를 지나 박물관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기면, 시대별로 촘촘하게 구획된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전시의 동선을 따라 걷는 일은 곧 우리네 영화가 걸어온 발자취를 순서대로 따라가는 여정. 흐릿하고 거친 화질의 흑백 영화부터, 당대의 화제작 포스터가 빼곡하게 내걸린 1980년대의 거리 풍경, 황금빛 조명 아래 LP 사운드트랙과 영화 잡지들이 가득 꽂힌 아카이브 선반, 이제는 대형 멀티플렉스에 밀려 자취를 감춘 단관극장(단일 상영관)의 정취까지. 스크린 안팎의 풍경들이 전시관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시절을 지나온 어른들에게는 기꺼이 줄을 서서 영화를 기다리던 극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날로그 시대로의 초대장이 된다.

영상 카메라

빛바랜 종이와 낡은 카메라에 깃든 창작의 진심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던 시선은 스크린 이면에서 치열하게 움직였던 ‘만드는 사람들’의 유물로 향한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 검열 대본과, 빼곡한 메모와 함께 컷을 나눈 〈꼬방동네 사람들〉(1982)의 시나리오 장면표(촬영 내용을 장면별로 쪼개서 정리한 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창작자의 고뇌를 보여준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을 종이 위에는 시대의 목소리를 스크린에 담아내기 위한 고된 노동의 흔적이 가득하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 걷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상처 입은 유물들’이다. 6.25 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전장을 누비던 고(故) 김학성 촬영기사의 낡은 ‘코닥 레티나’ 카메라 전면에는 놀랍게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총알이 지나간 그 카메라로, 그는 끝내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란 속에서도 기어코 시대의 민낯을 렌즈에 담아내려 했던 절박함이 차가운 금속 위에 뜨겁게 남아 있다.
불의의 화재로 세상을 떠난 김기영 감독의 수첩은 겉면이 까맣게 그을린 채로 전시되어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 〈기생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봉준호 감독이 〈하녀〉를 자신의 영화적 뿌리로 꼽았듯, 잿더미 속에서도 살아남은 영화에 대한 진심은 후배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창작자의
고뇌를
보여준다.

1980년대 영화 포스터들 1980년대 영화 포스터들

한국영화 100선으로 선정된 101편의 작품 하이라이트 영상 <한국영화 100선>으로 선정된 101편의 작품 하이라이트 영상

보고 듣고 배우며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되는 곳

박물관 관람을 마쳤다고 해서 서둘러 나설 필요는 없다. 2층의 영상도서관에 올라가면 수천 종의 영화 관련 도서와 VOD, DVD, 블루레이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지하의 시네마테크 KOFA에서는 고전 영화부터 아직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해외 신작까지, 큐레이터가 직접 선정한 프로그램이 정기적으로 상영된다. 박물관에서 한국 영화의 역사를 배우고, 도서관에서 그 맥락을 더 깊이 읽고, 극장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하루.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루를 오롯이 영화로 채울 수 있는 더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기획전시실도 놓치지 말자. 현재는 다음 전시를 준비 중이지만, 한 해 두 번씩 새로운 주제의 기획전시가 열려 영화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까지 〈대사극장〉, 〈셀 위를 달려라, 길동!〉 <디깅 사운드트랙— 엘피, 카세트, 시디로 듣는 한국영화의 음악들〉 등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 공간을 거쳐 갔다.
박물관 관람으로 생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아이들이 빛과 그림자의 원리를 배우는 그림자 극장부터 초등학생들이 모여 직접 단편 영화를 만들고 지하 극장에서 상영까지 해보는 아카데미 프로그램은, 미래의 영상 창작자들을 길러내는 창구가 된다. 박물관 내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해설을 돕는 친근한 로봇 큐아이(QI) 역시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길잡이다.
100년 전 어두운 천막 안에서 처음 돌아가기 시작한 영사기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꿈과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수많은 영화인이 남긴 치열한 기록은 새롭게 카메라를 쥐는 미래의 창작자들에게 단단한 이정표가 되는 동시에, 스크린 앞의 관객들이 영화를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다정한 안내서가 되어준다. 박물관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가 극장에서 마주할 다음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영화인들이 수상한 주요영화제 및 영화상의 트로피 영화인들이 수상한 주요영화제 및 영화상의 트로피

달세계 여행, 채색 체험 존 달세계 여행, 채색 체험 존

영화인이
남긴 치열한
기록은
관객들이
영화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다정한
안내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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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화 큐레이터 일러스트
정민화 큐레이터 (한국영화박물관)

Q. 한국영화박물관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영화박물관은 한국영화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전문 박물관입니다. 1900년대 영화가 조선에 처음 소개된 때부터 현재까지 시대별 흐름을 통해 한국영화의 태동부터 성장, 발전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Q. 관람객들이 한국영화박물관의 전시를 통해 무엇을 느끼길 바라시나요?

관람객들이 한국영화의 역사를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 실제로 ‘체감’하길 바랍니다. 영화인들이 기증한 시나리오, 카메라, 의상 등 희귀 자료를 통해 당시 제작 환경을 간접적으로 느껴본다면 이를 통해 영화의 맥락을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또 참여형 전시를 통해 영화사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

타이틀 아이콘 전시명: <한국영화를 보다>, <초기 영화로의 초대> 장소아이콘 장소: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 한국영상자료원 1층 시간 아이콘 관람 시간: 화~금 10:00~19:00 /
주말 및 공휴일 10:00~18:00 (월요일 휴관)
입장료 아이콘 입장료: 무료 문의 아이콘 문의: 02-3153-2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