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를 만나다
‘나’를 표현하는 자유로운 선율
서울과 세계의 음악 교육 변화
글. 이현도 (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클래식 공동 저자)
지금 세계를 만나다
글. 이현도 (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클래식 공동 저자)
세계는 지금 음악 교육의 악보를 새로 쓰고 있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음악 수업은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경험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최근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합창, 창작 활동, 다문화 음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 교육의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 교육과 서울 음악 교육을 살펴보고 음악이 아이들의 감각과 경험을 어떻게 넓혀주는지 알아보자.
독일: 모든 아이를 위한 악기, 춤, 노래
독일 에르프트슈타트의 에리히 케스트너 초등학교 일주일에 한 번 ‘제키츠 오케스트라’에 모여 본격적인 합주를 시작한다. 도레미조차 서툰 아이들이지만, 소리를 내고 싶은 욕망을 꾹 참고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연주를 시작하는 ‘기다림과 경청’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비로소 친구와 함께 연주하며
음악으로 하나 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곡을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경제적 배경도, 인종의 벽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모든 아이를 위한 음악 교육, 제키츠(JeKits)다.
‘모든 아이를 위한 악기, 춤, 노래(Jedem Kind Instrumente, Tanzen, Singen)’의 약자인 제키츠는 가정의 경제적·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어린이가 예술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더 놀라운 이유는 그 압도적인 규모와 정교한 시스템에 있다. 주 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모든 아이에게 보편적 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시스템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례로, 특히 이민자 가정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을 껴안는 ‘사회적 통합 모델’로서의 성과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와 함께 공교육 기반 예술 교육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한다. 음악이 교실에 앉아 답을 찾는
단순한 교과인 것을 넘어 사회적 통합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소통의 도구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핀란드: 악보 밖에서 시작되는 진짜 음악
핀란드의 학교 음악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딱딱한 책상이 아니라, 교실 곳곳에 배치된 전자기타와 베이스, 드럼, 그리고 화려한 신시사이저다. 핀란드 교육은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전에, 아이들이 가장 직관적으로 반응하는 ‘리듬 음악’을 통해 음악의 즐거움을 먼저 깨우치게 한다. 수업의 풍경은 사뭇 파격적이다.
아이들은 악보 읽는 법을 배우느라 진땀을 빼는 대신, 곧바로 오늘 배운 세 개의 코드로 간단한 록(Rock) 리듬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다. 전자기타의 강렬한 소리와 드럼의 거친 비트 속에서 아이들은 음악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수업은 자신들만의 일상이나 고민을 가사로 쓰고 멜로디를 붙이는 ‘송라이팅(Songwriting)’수업이다. 완벽한 연주보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적극 장려하는 이 과정에서 음악은 ‘평가받는 과목’이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자유로운 언어’가 된다. 이때 교사는 아이들을 통제하는
권위자가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조력자일 뿐이다. 이러한 핀란드의 밴드 문화는 악보 속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법을 배우는 대신, 예술이 주는 즐거움과 해방감을 만끽하게 한다.
일본: 전국대회를 넘어 일상의 선율로
일본은 방과 후 ‘부카츠(부활동)’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청소년 음악 기반을 완성했다. 학교생활을 넘어 학생들의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하는 부활동은 근대 일본 음악 교육의 상징과도 같았다. 부활동의 뿌리는 메이지 유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의 군악대 문화가 학교 교육과
결합하면서, 개성을 누르고 집단에 나를 맞추는 합주 과정은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화(和)’의 정신을 함양하는 최적의 훈련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전국대회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력투구 문화는 일본의 고교 관악 합주가 세계 무대를 석권하는 독보적인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일본은 과거의 결과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평생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생애 학습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말 부활동을 지역 사회 민간단체로 이관하는 지역 이관 프로젝트는 학교라는 좁은 틀을 깨고, 아이들이 마을의 다양한
세대와 함께 연주하며 소통하는 지역 예술 공동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일이다. 일본의 변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의 우리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통해 무엇을 주려 하는가, 우리는 결국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말이다.
서울: 악기 나눔에서 예술 공감터까지
서울의 음악 교육은 모든 학생이 환경에 상관없이 예술을 누릴 권리를 보장하는 ‘예술적 기본권’을 확립하는 것으로 그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온라인 수업뿐 아니라 오프라인 수업에서도 활발히 일어났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추진하는 ‘1인 1악기’ 정책은 모든 아이가 자신의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예술적 기본권’을 구현해 낸 것으로 한국판 제키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시민들이 기증한 악기들을 숙련된 장인들이 모인 ‘낙원 악기 나눔센터’에서 섬세하게 수리하여 다시 서울의
각급 학교로 전달하는 ‘악기 기부 및 나눔’ 사업은 자원의 순환뿐 아니라 음악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협력 종합 예술 활동은 중학교 교육과정 내에서 한 학기 동안 뮤지컬, 연극, 영화 제작 등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단순히 노래 한 곡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대본을 쓰고, 배역을 정하며, 무대 동선과 리듬을 조율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된다. 아이들은 단순히 지식을 수용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수업의 주체로 거듭나고,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하나의 작품으로 실체화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그야말로 아이들이 배움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학교 내 공간의 변화인 ‘예술공감터’도 힘을 보탠다. 학교 내의 빈 교실이나 복도, 로비 등을 소규모 공연장이나 아늑한 창작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음악실을 벗어나 언제든 편하게 악기를 잡고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음악에 대한 접근성을 대폭 늘렸다.
자치구와 협력하여 운영하는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나 소외계층 아이들을 위한 ‘꿈의 오케스트라’ 활동은 경제적 형편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는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넘어, 문화 환경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학생들이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물리적·심리적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특히 학생들이 지역 축제에 참여해 직접 연주를 선보이는 과정은 음악이 일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음악이라는 것이 특정 계층이나 먼 곳의 공연장에서만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동네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쉽고 편한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 연계 활동은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에 애착을 갖게 함과 동시에, 지역 사회 전체의 문화적 접근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기반이 된다.
음악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연주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인격체를 길러내는 데 있다. 악보 속에서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악보 너머에 있는 넓은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던 현대의, 그리고 미래의 음악 교육은 이제 서울교육 현장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