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재발견
기억의 뼈대 위에 지어진 공간,
박물관이 된 학교
서울공예박물관
글. 박향아 / 사진. 김성재
역사의 재발견
글. 박향아 / 사진. 김성재
오랜 시간을 품은 공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다. 웅장한 조선 왕실의 안동별궁이 자리했던 터는 수많은 학생의 꿈이 자라는 배움의 요람, 풍문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제 한국 공예의 찬란한 역사를 담은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과거의 건물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대신, 옛 학교의 뼈대를 남기고 새로운 가치를 채우는 방식을 택한 공간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살아있는 아카이브다. 공간이 품은 이야기, 장인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을 즐겁게 탐험할 수 있는 곳,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옛 풍문여고의 모습이 남아있는 박물관 내부
인사동 길을 지나 탁 트인 야외 마당에 들어서면, 예전 운동장을 굽어보던 건물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2021년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은 70여 년간 자리를 지켰던 옛 풍문여고 건물을 품고 있다. “오래된 건축을 남기는 것이 곧 사람들의 기억을 남기는 일”이라 여긴 건축가 천장환 교수는, 졸업생들이 다시 찾았을 때
낯설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도록 공간을 세심하게 디자인했다. 건물 외벽을 옛 페인트 색과 닮은 부드러운 석재로 마감하여 과거의 온기를 유지했다.
박물관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 공간이 품은 사연들이 본격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전시실과 전시실을 잇는 길목마다 나란히 배열된 크고 긴 창문, 쉬는 시간이면 학생들이 우르르 뛰어다녔을 폭넓은 계단과 긴 복도가 옛 학교의 정취를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특히 전시 1동 3층과 전시 2동 2층 사이를 잇는 통로에 자리한
창문은 ‘공간이 품은 세월을 마주할 수 있는 특별한 통로’다. 창 너머로는 옛 풍문여고 학생들이 수없이 바라봤을 400년 된 은행나무 동산이 펼쳐지는데,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이 나무는 박물관의 산증인이다.
은행나무 옆에 무심히 놓인 이재순 작가의 돌의자 등 곳곳에 배치된 공예 작품들, 그리고 옛 안동별궁 터의 야트막한 동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며 관람의 즐거움을 더한다. 전시 3동의 통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고즈넉한 안국동 전경, 교육동(어린이박물관)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인왕산 풍경도 놓치지
말아야 할 코스다.
박물관의 건물이 과거의 기억을 품고 있다면, 전시 1동부터 3동까지 이어지는 상설전시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공예의 역사를 아우르는 공간이다. 먼저 전시 1동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조선부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공예의 흐름을 짚어보고, 선비의 기품이 서린 문방 공간을 마주하며 시대가 투영된 공예
이야기를 확인하게 된다. 이어지는 전시 3동은 기증품의 가치를 오롯이 담아낸 공간이다.
2층 〈자수, 꽃이 피다〉에서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의 자수 병풍을 회화적 관점으로 감상했다면, 3층 〈안동별궁, 시간의 겹〉에서는 순종의 가례 120주년을 기념해 안동별궁터와 얽힌 인물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기 공예의 미학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공예의 가치를 가장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은 단연 전시 2동 2층의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 전시다. 돌, 흙, 나무 등 거친 자연의 소재가 장인의 손끝을 거쳐 비로소 ‘쓰임’이 있는 예술로 거듭나는 치열한 과정을 다룬다.
그중에서도 고려 나전경함 재현품이 전시된 공간은 천천히 머물며 자세히 보길 추천한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작은 나전칠기함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네 명의 장인이 마음을 모았다. 나무 뼈대를 짜는 소목장, 수백 번 칠하고 갈아내기를 반복하는 칠장, 전복 껍데기를 섬세하게 붙이는 나전장, 그리고 금속 장식으로 마침표를
찍는 두석장까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 불리는 장인들이 천 번에 가까운 공정을 2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으로 견뎌냈다. 화려한 작품 이면에 숨겨진 이 지난한 기록들은 ‘공예는 결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합쳐야만 완성되는 예술’임을 보여준다.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을 담은 공예
공예의 가치를 전하는 장인의 도구들
전시물만 훑어보고 서둘러 박물관을 나선다면 절반의 즐거움을 놓치는 셈이다. 서울공예박물관은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예품이다. 개관 당시 진행된 ‘오브젝트 9(Objects 9)’ 프로젝트 덕분에 박물관 내외부 곳곳에 9명의 공예 작가들이 만든 실용적인 작품들이 스며들어 있다.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앉아보며 쓸 수 있도록 기획된 작품들이다.
안내데스크부터 남다르다. 흙과 나무, 금속 등 각기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데스크 자체가 작가들의 작품이다. 넓은 야외 마당의 나무 아래 훌륭한 쉼터가 되어주는 이강효 작가의 분청 의자 세트, 전시 1동 로비의 최병훈 작가 아트 퍼니처, 안내동 천장에서 빛의 산란을 보여주는 김헌철 작가의 유리 공예 작품까지,
다채로운 예술이 일상처럼 놓여 있다. 전시실 사이를 오가는 복도나 휴게실, 계단 곁에 무심코 놓인 스툴 하나도 공예 작가의 손길이 닿은 작품일 수 있으니, 보물찾기하듯 박물관 곳곳에 자리한 작품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눈길이 필요하다. 무심코 걸터앉은 의자가 누군가의 치열한 노력이 빚어낸 작품임을 깨닫는 순간,
감동은 배가 된다.
공예도서실 혜윰공방
다채로운 관람을 마친 후에는 각자의 호기심을 더 깊게 채울 수 있는 공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교육동(어린이박물관) 2층 '공예마을'과 3층 '아이들스튜디오'는 아이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지며 공예의 원리를 체득할 수 있는 신나는 체험의 장이다. 전시 1동 1층에 자리한 공예도서실은 미술·공예·역사 관련
국내외 전문 도서 1만여 권을 갖추고 있으니, 잠시 머물며 책 속에서 펼쳐지는 공예의 세계를 경험하길 추천한다.
4월 28일에는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시 <더 하이브리드>가 개막한다. 1889년과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대한제국 공예품들을 비롯해 프랑스 국립 기메동양박물관, 파리 국립 기술공예박물관,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 소장품이 함께 전시된다.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탄생한
하이브리드 공예의 의미를 깊이 있게 돌아보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과거 배움의 요람이었던 옛 학교 건물은 이제 장인들의 땀방울과 공예의 가치를 오롯이 품은 살아있는 교실이 되었다. 이 특별한 박물관의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작은 사물들이 오랜 손끝의 시간 위에서 만들어진 노동의 산물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장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50m)
관람 시간:
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1월 1일 휴관)
입장료:
무료(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한 경우에만 입장 가능)
문의:
02-6450-7000, craftmuseum.seoul.go.kr